■ 넷플릭스 새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는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천명한 4명의 메시아, 대한민국을 뒤흔든 이들의 실제 사건을 파헤쳤습니다. 시리즈 4화에서는 오대양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오대양 사건은 1987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던 주식회사 오대양 공장에서 일어났던 집단 자살 사건입니다.
나는 신이다 4화 오대양 사건은 세월호 사건으로 알려진 구원파 유병언과의 연관 의혹이 새삼 제기되면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1. 박순자와 31명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일까요?
오대양은 민속 공예품을 만드는 회사이자 88 올림픽 공식 지정 업체로 선정되기도 한 회사였습니다.
대전에 본사와 공장, 그리고 용인에도 공장을 둔 회사 오대양은 사회사업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에 오대양은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보육 시설, 초중고 학사 운영, 직원들 위한 기숙사 지원, 최고급 생필품 지원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꿈같은 회사로 대중에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의 사장은 대전에서 칭송받는 여성 사업가 박순자였습니다.
박순자는 고위 공무원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 셋을 낳았고, 자식 셋도 모두 자신의 회사 직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전에서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습니다.
대전에 사는 한 중년 부부의 큰 딸이 오대양 공예품 회사에 비서로 입사한 뒤 동생들을 추천했고, 7남매가 모두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오대양에서 일하는 자녀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 중년 부부는 1987년 오대양에 5억 원을 투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돈이 필요해진 중년 부부는 투자금을 돌려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큰딸은 못마땅해하면서
"사장님과 직접 이야기해 보라"며 부모를 회사로 불렀고, 중년 부부는 회사로 갔습니다.
중년 부부가 본사의 문을 여는 순간 직원들이 몰려나와 부부를 둘러싸고, 몇몇이 정문을 걸어 잠그며 부부를 압박했습니다.
이들은 부부를 곧바로 창고에 가뒀고 폭행을 시작하며 채권포기각서에 사인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폭행이 일어나는 자리에는 중년 부부의 큰 딸과 사위도 함께하고 있어 충격을 더했습니다.
2. 결국 채권포기각서에 지장을 찍고 풀려난 중년 부부는 곧바로 경찰에 이들을 신고했습니다.
이에 오대양 사장인 박순자도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박순자의 조사 당시 카메라를 든 취재진이 몰려왔고 폭행 사건 사주에 대해 추궁하자 박순자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에 박순자의 남편도 놀라 아내를 찾아왔습니다.
얼마 후 안정된 아내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 그런데 이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박순자가 자식 셋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찾기 시작했지만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채권 포기 강요 폭행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회사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박순자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였습니다.
이틀 만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왔고 이들이 빌려준 액수는 총 80억,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260억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3. 당시 박순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돈을 빌렸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이윤을 남기지 않고 투자자들에게 모두 돈을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와 관련해서는 이자 지급은 반드시 은행 계좌를 이용하고 이자 지급 일자는 단 1시간도 어기지 않으며 이렇게 투자자들에게 돌려주는 이자율은 3~40%의 고 이익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순자는 이 원칙을 3년 동안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그에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고, 박순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 자체가 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사실 박순자는 대전의 천사가 아닌 대전의 큰 손이었던 것입니다.
폭행 사건 이후 이상함을 느낀 언론에서 본격적으로 오대양을 탐문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대전 공장에서 석연찮은 점을 발견했습니다.
오대양 공장에는 자개농 등 이 회사에서 제조하는 제품들이 존재했지만 실제로 제품을 제조한 흔적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고 보여주기 식의 전시 상품 같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경찰도 이 사건을 단순 폭행 사건이 아닌 대형 사기 사건으로 전환하고 박순자를 지명 수배했습니다.
4. 그리고 이때 박순자뿐만 아니라 이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직원뿐 아니라 보육 시설의 아이들까지 모두 80여 명이 한날한시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에 경찰은 곧바로 수색에 나섰고, 용인 공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박 씨의 남편도 아내와 자식을 찾기 위해 용인 공장을 찾아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장 씨 아줌마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주방 아줌마 장 씨는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다며 묵묵부답이었습니다.
1987년 8월 28일, 모두가 사라진 나흘째 되던 날, 경찰서로 한 통의 제보 전화가 왔습니다.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용인 공장에 있다는 제보였습니다. 제보자는 끈질긴 추궁에도 자신의 정체는 알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용인으로 다시 출동한 경찰들. 앞서 수색 때와 별 다른 것이 없는 현장, 그러나 이때 창고 안을 둘러보던 경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리가 들린 곳은 창고 안 쪽이었습니다.
창고 안 쪽은 박스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채워져 있었는데 경찰은 귀를 바짝 대고 다시 소리를 들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상자 너머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벽처럼 쌓아놓은 박스 뒤쪽에는 그곳에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는 49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49명의 인원이 3박 4일 동안 경찰의 수색을 피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5. 하지만 박순자를 비롯한 나머지 32명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경찰은 49명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했지만 이들은 모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찰은 발견되지 않은 사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이들이 투자 유치를 많이 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상자 뒤에 숨어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채무가 적은 이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회사의 직원들의 주 업무는 돈을 빌리는 것으로 직원들 모두가 채무자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박 씨의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찾기 위해 다시 용인 공장으로 와서 주방 아주머니 장 씨를 추궁했지만 어떤 답도 얻지 못하다가,
1987년 8월 29일 낮 1시에 장 씨가 박 씨의 남편을 찾아와
"공장에 찾으시는 분들이 있어요. 공장장이 있는데 위에 있는데 이상해요"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박 씨의 남편은 장 씨와 함께 공장을 다시 방문했고 장 씨가 가리키는 휴게실 천장의 구멍을 주시했습니다.
장 씨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고, 이에 박 씨 남편은 고무통을 받치고 올라가 겨우 머리만 내밀고 내부를 확인했습니다.
박 씨 남편은 손전등을 켜고 위를 확인했고 그 순간 속옷 차림의 한 남성이 서까래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남성은 바로 이 회사의 공장장 최 씨였습니다.
박 씨 남편은 사람들과 경찰을 불러 모았고 천장을 뜯고 본격적인 수색이 시작되었습니다.
6. 천장 위를 확인한 경찰은 누구도 말을 못 하고 얼어붙었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목을 매고 있는 공장장 옆에는 겹겹이 포개져 사망한 12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5m 떨어진 곳에 19명의 시신이 쌓여있었고, 그 안에 박순자와 그의 자식 셋도 있었습니다.
사라졌던 32명이 천장에서 모두 사망한 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어떻게 죽은 걸까요?
천장 위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모두 속옷이나 잠옷 차림이었고 손과 발은 결박된 상태였습니다. 또한 입과 코는 휴지로 막혀있고 몇몇은 목에 빨간 줄이 그어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31명은 교살당했고 1명은 자살한 것입니다.
이에 몇 가지 가설이 제기되었다.
1번째 가설은 공장장이 혼자 31명을 살해한 후 자살을 한 것.
하지만 혼자서 31명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렇다면 독극물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부검 결과 시신 내에서 독극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입과 코를 막은 휴지에서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망 추정 시간은 29일 새벽 1시부터 아침으로 박 씨의 남편이 장 씨를 추궁하던 시간인데 그가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것으로 제1가설은 무리라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2번째 가설은 제삼자 타살설.
제삼자가 외부에서 모두 살해한 후 공장에 옮겨두고 공장장이 자살한 것으로 위장했다는 것인데 당시 언론은 이를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았지만,
여기에도 석연찮은 점은 존재했습니다.
휴게실에 있던 작은 구멍 그 안으로 32명을 옮기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샤워실 위 천장이 뜯어져 있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지문 감식 결과 천장 위까지 닿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의 지문과 장문이 발견되어 충격을 안겼습니다.
특히 천장 바닥은 석고 보드로 만들어져 외부에서 시신을 옮기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과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진행한 실험에서도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3번째 가설은 자의에 의한 타살.
32명의 시신 중 단 한 구도 저항의 흔적이 없다는 기이한 점이 포착되었습니다.
32명 모두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들 모두 자신의 죽음을 아무 저항 없이 온전히 받아들인 바로 자의에 의한 타살입니다.
7. 당시 경찰은 시신 발견 2,3일 후 현장에서 찢어긴 쪽지 67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이 종이들을 모두 모아 보니
"절대로 입 닫아라. 이미 의식이 없으시다. 네 시간 전부터 다섯 명 정도 갔다.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온 거다. 성령인 도로 너만 버텨라"라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바로 주방 아줌마 장 씨를 향한 것이었다.
이에 경찰은 장 씨를 다시 추궁했고 진술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장 씨는
"박순자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 회사 직원들은 모두 신도였다. 이 회사는 회사가 아닌 종교 단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대양이란 오대양 육대주의 오대양을 뜻하는 것으로 박순자는
"다섯 개의 바다를 내가 주관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다섯 번 죽다 살았다. 머지않아 전 세계를 주관할 것이니 오대양을 주관하는 하느님인 나를 따르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기도만으로 한 달 만에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박순자는 이후 종교에 심취했고 여러 종교를 전전하다 스스로 종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리고 신도 유치를 위해 사회사업가로 위장해 복지사업까지 했던 것입니다.
믿음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박순자는 신뢰가 쌓이면 돈을 빌리기 시작했고, 더 확실한 신뢰가 쌓이면 오대양에서 함께 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에 채권자 상당수가 오대양 직원이자 신도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88년 말세론을 믿었던 오대양 교주 박순자는 구원받으려면 무조건 교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신도들을 세뇌시켰습니다.
또한 집단생활로 생활을 통제하고 세뇌시켰고 금욕 생활을 강조하며 부부간의 교류와 공감을 차단했습니다.
또 교주의 지시를 어기면 매타작을 했는데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신도들끼리 서로를 때리게 했습니다.
철옹성 같았던 박순자의 오대양은 중년 부부 폭행사건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박순자는 자식들과 용인 공장으로 도주한 후 신도들도 모두 그곳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박순자는 천장에 은신하자고 제안했고, 좁은 공간 때문에 스스로 천장에 올라갈 인원을 추렸습니다.
자신의 자식과 열성적인 신도들만이 천장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신도들에게는 "너희는 아직 믿음이 부족하지 위로 올라갈 수 없다"라며 박스 뒤에 숨으라 지시했습니다.
박순자에게 선택되지 않아 생존하게 된 생존자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당시 같이 못 올라가고 같이 생활 못한 게 너무 서운하고 부럽고 버림받은 느낌이었다"라며 믿음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8. 샤워실에서 발견되었던 수많은 손자국은 박순자와 그에게 선택받은 31명이 스스로 천장 위로 올라가면서 만들어낸 자국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천장에 올라가자마자 자신들이 올라간 흔적을 은폐했고, 추락에 대비해 시멘트 통로에 각목을 놓고 합판을 깔아 세 군데의 은신처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은신처는 총 5평의 공간, 이곳에서 32명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4박 5일을 지냈던 것입니다.
당시 이들은 대소변을 참기 위해 금식했고, 제일 더울 때 70도까지 올라가는 더위가 가장 버티기 힘든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발견 당시 속옷 차림이나 잠옷 차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사망자들이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8월의 70도의 더위 속에 교살이 되어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가장 먼저 교주 박순자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하게 한 뒤에 이경수를 비롯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교살시키고,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하고 마지막에 이경수 목을 매었다는 것이 경찰의 결론이었습니다.
신도들은 거의 탈진 상태에서 죽임을 당하니 저항을 하고 싶어도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저항할 마음도 없었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교주가 가장 먼저 사망하자 신도들은 교주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혹자들은 고액의 채무로 자포자기한 심정이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사이비 교주 오대양 박순자와 신도들의 자의에 의한 타살, 집단 자, 타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9. 오대양 사건의 또 다른 의혹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삼우트레이딩 명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우트레이딩은 사장은 구원파 유병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대양 교주로 알려졌던 박순자는 유경언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사건 현장에서는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라는 구원파 책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박순자의 오대양은 유병언을 위해 사채를 모으기 위한 회사였으며 오대양이 개발비 명목으로 사채를 모집해 돈을 보내면 그 돈을 유병언이 사용했다는 여러 증거들을 나왔습니다.
1991년 7월 구원파 신도 6명이 돌연
“자신들이 오대양 사건을 저질렀으며 박순자 씨가 지시했다”라고 자수하면서 다시 오대양 사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수 1년 전부터 유병언의 세모 간부들 및 현직 경찰들과 모임을 하고 말을 맞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검찰은 1991년 8월 유 씨를 상습사기 혐의로 구속했을 뿐, 무성한 의혹들의 실체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또다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당시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은
“박순자는 세모에서 사채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했다”면서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박 씨는 오대양교의 교주가 됐고 동반자살을 지시한 걸로 둔갑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40도가 넘나드는 여름 날씨에 공장 천장에서 32명이 공동생활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그때 사채의 흐름과 유병언 씨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했더라면 27년 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제2의 오대양 참사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실제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4부에서는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이 다큐는 오대양의 돈이 세월호 참사와 연관된 유병언에게 보내졌음도 밝히기도 했습니다.
◆사회 곳곳에 JMS교회,학원들, 이런 곳은 피해라. 충격적인 JMS 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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